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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정보

현 가치 800억, 日 돕고 재산 축적한 '이 사람' 이완용보다 5배 더!!

by 디피리 2024. 8. 15.

고종의 형 이재면(1845∼1912)이 일제에 협력하여 '조선 최고의 현금 부자'로 알려진 이완용보다 훨씬 더 많은 재산을 축적한 사실이 광복절을 맞아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흥친왕으로 책봉된 이재면. 사진=위키백과

 

이재면은 흥선대원군의 장남으로, 1911년 1월 13일 일본으로부터 '은사공채'라는 국채증서를 받았습니다. 이 증서에 적힌 금액은 무려 83만 원으로, 이는 같은 을사오적인 이완용(1858∼1926)이 받은 15만 원의 5배에 달하는 금액이었습니다.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166억에서 83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러한 거액을 받게 된 이유는 이재면이 매국 행위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2009)에 따르면, 이재면은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위한 어전회의에 황족 대표로 참석하여 조약 체결에 동의했습니다. 이는 국권을 침해한 조약을 체결하거나 이를 모의한 행위로 규정됩니다.

 

이재면과 같은 친일파들의 일제 협력은 단순히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경제적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의도였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일제청산연구소의 연구위원인 김종성은 그의 저서 '친일파의 재산'에서 대표적인 친일파 30명의 재산과 행적을 당대 신문 기사, 회고록, 증언 등을 통해 조명하고 있습니다. 책에 따르면, 일제는 이재면과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이강(1877∼1955)에게 각각 83만 원을 지급하는 등 총 88명에게 600만 원(현재 가치로 약 1,500억에서 6,000억 원)을 은사공채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완용. 사진 =위키백과

이완용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부를 축적하여 '조선 최고의 현금 부자'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동산 소유 면적은 여의도의 7.7배에 달했으며, 대한제국 관직에서 물러날 때는 퇴직금까지 챙겼습니다. 또한, 국권 피탈 직후에는 초과 근무 수당까지 받아갔습니다. 1925년, 이완용은 민영휘에 이어 한국인 부자 순위에서 2위를 기록했으며, 현금 보유량에서는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재면과 이완용이 축적한 부의 규모와 이들의 행적은, 이들이 단순히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사적인 이익을 위해 협력한 것이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